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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항
- 돌아가신 분의 무덤이므로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유적지를 탐방하도록 지도한다.



학습장 안내
- 채세영 묘
시 지정 향토 유적 제2호(89.1.1)로 최근 청계통합정수장이 신설되면서 부지 북쪽으로 이장되어 묘역이 새롭게
조성되었다. 묘역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장명등은 사각형이며 상석은
고석이 없이 바로 개체석의 상면에 올렸다. 문인석은 조각수법이 비교적 간략하며 신체가 균형적으로 표현되었고 다소
세장한 느낌을 준다. 망주석은 문양을 간략하게 조각하였으며 세호가 없고 역시 다소 세장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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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세영
채세영(蔡世英:1490 ∼ 1568)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영지(英之), 호는 임진당(任眞堂), 본관은
평강(平康)으로 첨정 채자연의 아들로 1517년(중종1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1519년 검열을
거쳐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 이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 등을 처벌할 때 가승지(假承旨)
김근사(金謹思)가 죄상을 고치려 하자, 사필(史筆)은 아무나 들지 못하는 것이라 꾸짖고 붓을 도로 빼앗았으나 이로
인해 파직당했다.
1533년 세자시강원의 문학, 필선, 보적을 지내고 집의, 응교, 전한, 직제학을 거쳐 153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1539년 형조참채가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 후 호조와 병조의 참의, 우승지 ,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1548년 이문정시에 장원하고
1550년 호조참판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공조,
호조의 판서를 지내고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으며 천문, 의약, 중국어에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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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크기는 195×98×24cm로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는데 전면에는 용의
머리 부분이 후면에는 꼬리 부분이 양각으로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다. 비문에는 1519년 을사사화 때 가승지(假承旨임시로
임용된 승지) 김근사(金謹思)가 죄상을 고치려 하자 "이것은 사필(史筆)이다. 타인이 쓸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며 이를 거부하다가 파직당한 사건의 전말을 소상하게 적고 있으며 그의 인품이 뛰어나고 학문에 침잠하였을 뿐 아니라
천문, 의약, 중국어에도 능통하였으며 신하로서 자식으로서 충과 효에 철저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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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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