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중국여행 - 자르비노,훈춘,백두산

자르비노, 훈춘, 백두산 / 2003년 8월 7일 (목)

5시 반에 일어났다. 7시 반에 러시아에 도착하여 새로운 풍경들을 구경했다. 초지의 언덕과 집들이 이국적인 자르비노항은 오래되고 낡은 곳으로 참으로 시골스럽다. 주변은 비포장도로이지만 60년대 풍경같은 이 모든 것이 포근하고 자연스럽다.

11시 반에 내려서 면세점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엇한 자그만 러시아 가게에서 깨과자(쿠키), 아이스크림, 쵸콜렛 등을 샀는데 그 맛이 정직하고 풋풋하여 무척 만족스러웠다. 특히 우리 모두는 근으로 달아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깨과자의 풍부한 재료와 맛에 감탄했다(천원 정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은 적고 품질은 별로 였던 많은 과자들을 생각하면 속고만 살아 온 느낌이다. 요구르트도 맛이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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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러시아인형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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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람들은 태도나 표정이 무뚝뚝하고 무덤덤하다. 서양사람들을 생각하면 언뜻 잘사는 모습이 연상되는데 길에서 도로 포장 중인 노동자나 시골 사람들 모습을 보면 정말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표정 속에는 솔직함과 순수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서양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레 신기하다. 이곳은 동쪽 끝 동양인데 말이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12시 50분에 버스로 자르비노항을 떠났다. 2시 반까지 1시간 40분 동안버스에서 본 자르비노의 풍경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렇게 넓은 광활한 벌판과 초지, 굽이치는 작은 내와 강들을 러시아는 왜 농사짓지 않고 방치해 두었을까. 아직까지 이런 곳이 남아있는가 싶을 정도로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다. 내려서 마냥 쏘다니고만 싶은 원시의 들판에는 마타리 등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지천으로 피어있다. 좁은 시골길을 달리며 마치 꿈속의 풍경을 보고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안개가 낀 풍경에서 서서히 해가 드는 끝없는 구릉과 이국적인 벌판, 멀리 보이는 한 그루 나무의 그림자, 우리가 달렸다던 만주 벌판이 저런 것이었을 것이다.(그러나 중국은 현재 모든 땅에 빈틈없이 곡물을 재배하고 있어 말달리는 만주벌판이 없다). 눈을 뗄 수 없는 풍경들을 보러 내릴 수가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집 한 채 없는 벌판만이 계속 펼쳐지다가 작은 시골 마을 하나를 지났다. 이 사람들은 왜 주변에 농사도 제대로 짓지 않는지 뭘 먹고사는 건지 정말 궁금했다. 레닌 모자이크가 있는 건물의 벽도 보인다. 자르비노는 다음에 꼭 다시 와보고 싶은 곳이다. 이곳 떄문에 러시아를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지금도 중국의 풍경보다는 자르비노의 벌판이 더 많이 떠오르고 꿈속의 모습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꽃을 좋아하는 언니와 나는 내내 감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크라스키노 세관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려 기다리는 동안 주변의 풀과 꽃들을 잠시 보며 멀리 펼쳐진 가지 못하는 길 너머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러시아 세관과 중국 장영자 세관을 거치는 동안 두시간이 흘렀다. 4시 반에 드디어 훈춘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시차로 인해 현지 시간은 1시 반이다. 조선족 동포들이 옥수수를 판다. 소나기가 한바탕 긋고 가더니 하늘은 금새 청명해졌다. 우리는 울산 패키지팀 가이드에게 의존하는 처지가 되었으므로 그쪽 대절 버스에 몸을 실었다. 졸지에 패키지 여행자 신세가 되었다.

훈춘시는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기 때문에 간판 아래에 한글로 쓰여져 있었다. 중국 땅에서 북한식 말투의 한글 간판을 계속 보게되니 신기할 따름이다. 이 노선이 생겨서 길도 넓히고 있고 뭔가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가 된 듯하다.  정해진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는데 떡 벌어지게 잘 차려줬다. 맛있게는 먹었는데 현지 조선족 가이드가 우리는 2만원이나 내란다. 조선족 현지 여행사와 조선족 가이드가 여러모로 우리에게 바가지를 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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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으로 가는 길, 두만강을 따라 북한 땅을 보면서 투어가 시작되었다. 방천에서는 지금은 중간이 끊겼으나 북한과 연결됐던 권하대교에 갔다. 가이드는 다리로 데려가 중간 지점을 넘어 가면서 이미 모두가 북한 땅을 밟은 것이라고 한다. 불과 몇 미터 앞이 북한이어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과 군인들이 가까이 보인다. 천진난만하게 물가에서 놀며 손을 흔든다. 북한의 기차도 지나간다. 국경이란 이렇게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저 강 건너 편의 사람을 보고 있을 뿐인데 그 곳은 갈 수 없는 땅이니 말이다. 여행 내내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두고 심각하게 사는 우리 인간들이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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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강너머북한아이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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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끊어진권하대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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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에서는 북한과 연결되어 지금도 이용하는 도문대교와 주변을 구경하기 위해 빠른 보트를 탔다. 위로 올라가 도문대교를 보고 아래쪽까지 한바퀴 돈다. 강폭은 불과 20여 미터로 북한 땅에 불과 5미터 정도까지 근접하여 달린다. 남한 관광객들이 지나가는 북한 병사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었는데 이 상황이 참 묘한 것이다. 이곳까지 관광을 와서 보트나 타고 손을 흔드는 상황이 그들의 고통과 대비되어 좀 철없게 느껴졌다. 의외로  북한 병사가 고맙게 손을 흔들어 준다. 그 순수한 마음에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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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북한이보이는곳.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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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렇게 곡예를 하듯 어렵게 살아야하는지. 북한 주민들은 가난, 미국의 전쟁 위협 등 갖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러나 전혀 다른 편한 처지에 있는 나는 그들에게 별 도움을 줄 수 없다. 이 강을 몰래 건너다 죽은 북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중에 가다가 탈북자들을 수용한 곳도 보았다. 그저 손을 흔들어 준 것이 고맙고도 미안하여 여러 가지 착찹한 심정이 되었다.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에 들어섰다. 평범한 시골의 작은 도시이다. 잠시 용정에 들러 용정중학교에 갔다. 운동장이 넓고 옛스러운 단아한 건물들이 있는 학교이다. 이곳이 맑은 영혼의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학교이다. 용정이라는 곳에 내가 직접 와보게 되다니 신기하다. 내가 상상하던 용정은 얼마나 낯설고 이국적인 느낌이었던지. 많은 독립투사들이 살던 기개 넘치는 곳을 상상했었다. 당시의 은진 중학교 건물은 지금은 박물관이고 앞에 윤동주 시비가 있다. 우리나라 분들이 학교 교육을 위해 기부하는 돈이 유용하게 아이들 교육을 위해 쓰인다고 하여 나도 약간의 돈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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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중학교박물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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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가는 길의 풍경은 두만강을 굽이굽이 끼고 흐르며 아름답기만 하다. 건너편의 북한 땅과 중국은 같은 풍광의 자연이지만 차이가 많다. 산꼭대기까지 무언가를 개간하여 헐벗은 것은 북한이고 옥수수든 무엇이든 천지에 먹을 것이 풍성히 자라는 땅은 중국이다. 그런데 이 중국 땅도 사실은 간도, 우리 땅이다. 지세부터 모든 것이 보면 우리 땅이라는 느낌이 확 든다.

갇힌 어린 곰들이 측은하게 느껴지는 곰 농장을 들러 저녁을 먹으러 갔다. 우리는 점심에 이미 상당한 비용을 지출한 터라 어두운 마당 한 쪽에서 가지고 있는 음식들을 먹었다. 밤 1시에 백두산 아래 비호산장에 도착했다. 2인실 두 개를 조선족 가이드가 배정하려 했으나 우리의 한국가이드 박상현씨의 덕분에 3인실 1개에 들었다. 숙소 값을 3만 5천원이나 받았다. 몹시 피곤하고 긴 하루였다. 3시에 일어나 백두산에 올라야 한다. 혹독한 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