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중국여행 - 이도백하,통화,집안

이도백하,통화,집안 / 2003년 8월 9일 (토)

아침 4시 40분에 일어나 짐을 챙기고 5시 55분에 출발하여 어스름 새벽에 아저씨 식당에 갔다. 여전히 청명하고 맑은 날씨는 북구의 서늘함이 있었다. 엄마는 새벽에 벌써 미인송원 부근까지 산책을 하셨다고 한다.

6시에 아저씨집, 손님이 많아 기다리라고 하셔서 앉아 30분 가량 있다가 소고기국과 밥, 비빔밥을 3인분만 시켰다. 그런데 4인분 이상의 양을 주셔서 밥하나를 물리고도 음식을 먹느라 버거울 지경이었다. 가만히 보니 여기 중국사람들은 과하게 시켜서 절반 이상 남기는 버릇이 있는 듯하다. 남는 음식이 아깝다. 점심 도시락까지 부탁하여 쌌다.

아저씨에게 수고비를 좀 드리고(뿌리치시는 걸 두 손에 억지로 쥐어드렸다) 서로 주소도 교환한 후 아쉬운 작별을 했다. 아저씨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던지 정말 고맙다. 택시기사를 불러 당부를 하셔서 그 기사가 역에서 현지인 가격으로 기차표를 끊어주었다(택시10, 팁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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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따로 통화에 가는 제자(아저씨는 예전에 교사생활을 하셨다)에게 우리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외국인이라 편히 가야한다고 생각했는지 우리를 경좌 특석에 앉혔다. 특석은 나중에 검표원이 차내에서 6원을 추가로 받는다. 제자는 다른 칸으로 갔다. 7시간 걸리는 통화까지 우리 돈으로 3000원 정도이다. 자리는 마주보게 되어 있는데 중간에 테이블이 있어 이야기하며 가기에 좋다.  이때부터 현지가격의 맛을 들인 우리는 외국인은 2배 요금이지만 중국인 가격으로 계속 끊고 다녔다.

7시 45분 에 출발하여 2시 40분 통화에 도착할 때까지 바깥은 아름다운 산지의 풍경이 끝없이 펼쳐지므로 전혀 지루하지 않다. 고지대를 달리고 있으니 굽이굽이 계곡과 꽃, 맑은 물, 아담한 마을들이 아기자기하게 계속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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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는 간식거리를 펼쳐 놓고 열심히 먹는 중국사람들의 모습들이 볼만하다. 참 잘 먹는데 해바라기씨를 까먹는 모습이 매우 빨라 재미있어서 결국은 1원 어치 사먹었다. 기차에서는 가끔 입담 좋은 직원이 잘 늘어나는 튼튼한 스타킹 양말 등을 쇼를 보여주며 팔아 구경거리가 된다. 엄마는 이 양말을 샀다. 사람구경, 장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가 쏠쏠하다. 젊은 신세대들은 우리와 꽤 비슷하며 한명의 자녀를 금쪽처럼 여기고 데리고 다니는 부모의 모습도 이채롭다.

아저씨가 싸주신 푸짐한 점심은 다 못먹을 만큼 많았고 맛있었다. 남은 밥을 저녁에도 먹었다. 해안이가 돌아다니다 사귄 중국인 모자에게 통화역에 도착하기 전 중요한 단어를 배웠다. 영어가 통하는 나이 드신 어머니 분께 '전통적 시장'을 여쭸는데 우리와 중국어는 발음이 매우 비슷했다. '촨퉁가 쓰이샤'란다.

비가 흩뿌리는 종착역 통화에 내리니 아저씨 제자가 우리를 데리고 나가서 택시기사와 흥정을 했다. 공공 교통수단을 이용하려 했는데 우리를 편하게 해준다고 이렇게 하나 보다. 우리와는 말이 한마디도 안 통한다. 흥정 후 우리를 태웠는데 제자와 손짓 발짓으로 대화해서 48원을 내면 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또다시 기사와 온몸으로 대화를 해서 48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탔는데 사실 정상적 가격은 120원 이었다. 나중에 결국 이 돈을 주었다.

집안까지는 2시간이 걸렸는데 그야말로 총알택시이다. 단지 평범한 택시라 생각하고 탔는데 경치도 좋은 이름다운 이 산지를 감상할 마음의 여유도 없게 직선도로가 나올 때는 빠르면 120k를 낸다. 속도 표지판이 무색할 지경인데 제법 운전 솜씨는 훌륭하다. 나는 이것도 운명이려니 생각하면서 그럭저럭 견뎠으나 뒷자리의 엄마는 사색이 되어 속도를 늦추려고 갖은 애를 쓰셨다. 기사와는 의사소통이 안되니 급기야는 옆에서 가만히 있는다고 나를 나무라셨다. 나와 엄마가 이 문제로 서로 목소리가 높아지자 운전기사는 기가 팍 죽었다. 말도 안 통하는데 우리에게 한바탕 바가지를 씌울 수도 있었으련만(초장에 그런 분위기를 보였다) 두 여자의 목소리가 보통이 아니니 포기했던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뭐라 해도 속도를 별로 줄이지 않는다.

드디어 집안의 입구에 도착하여 검문하는 공안을 만났다. 투어를 목적으로 왔다하고 일일이 여권을 보여주며 번호과 기타 목록들을 장부에 기록하였다. 그동안 엄마는 공안에게 난폭운전을 한 기사를 온몸으로 설명하여 고발하였으나 그들은 알면서도 웃기만 할 뿐이다. 오히려 기사가 우리의 시끄러움 때문에 자기가 혼났다는 듯 열심히 이야기를 해댄다. 이 공안들은 여유있고 순박했다(중국공안들은 원래 무섭다). 이렇게 달리는 것이 여기서는 별 문제가 안되는 모양이다.  

우여곡절 끝에 집안(현지어 지안)에 도착하였는데 택시비가 120원이라 하니까 기사의 말이 옳은지 여러 차례 확인한 후 돈을 주어 보냈다. 집안빈관 보통실(도미토리로 무척 깨끗한 3인 침대 1인 25원, 중국은 예치금 제도가 있어 일정액을 맡긴다. 이곳은 50원)에 숙소를 잡았는데 열심히 수리를 하여 매우 깨끗하고 좋았다.

프론트에서 친절한 한국인 사업가 할아버지를 한 분 만나게 되었는데 우리를 보고 반가워하셨다. 방에 놀러갔더니 이곳은 북한과 접경지역이고 북한 사람들이 있으니 밤에 주변을 돌아다니지 말라, 지금 집안은 고구려 무덤떼 등을 세계문화유산에 신청해 놓은 상태라 박물관부터 모두 수리중이고 접근금지이니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저 멀리서 한번 쓰윽 보아야지 가까이 가면 곤란한 일을 당할 수도 있으니 절대 안되고 혹시 물으면 그것들을 볼 목적으로 왔다하지 말고 단순관광으로 말하라고도 하셨다.

친구 정도가 될 적당한 가이드를 소개해 주신다며 연락도 해주었다. 이 조선족 주부는 슬슬 같이 돌아줄 것이라는 아저씨의 순진한 예상과는 달리 최소 3만에서 5만의 돈을 요구해 아저씨를 당혹스럽게 했다. 결국 우리에게 말도 못하고 미안하여 저녁만 거하게 사주시고는 나중에 그런 내막을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오히려 가이드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좋았지만 성의를 거절할 수 없어 가만히 있던 처지여서 다행이다 싶었다. 중국에는 우리를 봉으로 여기고 한몫 재미보려는 조선족과 그저 도와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조선족이 있다. 물론 도우려는 쪽이 대부분이다.

저녁은 이제 막 개업한 평양식당이라는 북한식당에 갔는데 전, 명태요리, 냉면 등 푸짐하게 계속 나왔다. 얻어먹는 것이 영 부담이었으나 값이 싸니 걱정 말라며 많이 들라고 하셨다. 요리는 깔끔하고 정갈하며 조미료 맛이 전혀 없는 순수한 맛이다. 전도 손바닥 반 만한 크기로 정갈하게 나온다. 그토록 기대하던 평양냉면은 면발을 잘못 삶은 듯 그렇게 맛있지는 않았지만 국물 맛이 순수했다. 아저씨와 같이 온 조카가 실제로 잘하는 집의 냉면은 정말 맛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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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막 개업한 집이다. 평양에서 종업원 아가씨들이 왔고 사장도 북한사람이다. 아가씨들이 계속 노래방기계를 틀어 놓고 노래를 해주는데 얼굴, 자태, 목소리가 어찌나 예쁜지 계속 보게된다. 조선족 아줌마도 춤추고 노래했다. 결국 나도 휘파람을 부르게 되고 런닝셔츠만 입은 사장과 다정히 어깨동무를 하며 우리가 하나라는 내용의 북한노래를 같이했다. 이곳은 북한, 중국노래 밖에 없다.

같은 민족이란 조선족 동포, 북한 사람, 남한 사람 모두 이리 좋은 것이다. 먹는 건지 노래방에 온 것인지 내내 이런 상황이었는데 처음 보는 북한사람들의 다정함에 흠뻑 빠졌다. 노래를 잘 부르면 조화 한 송이를 갖다주기도 한다. 사업가 할아버지에게도 '아바이'라 부르며 곰살궂고 친절하게 대한다. 식사하는 동안 국가보안법을 얼마나 위반했던지. 장사가 번창하기를 기원하며 헤어져 돌아오던 길에 새들새들하지만 맛난 천도복숭아를 잔뜩 사왔다.

길은 무지 어둡고 도대체 밤에는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이곳이 어떤 곳일지 알 수가 없었다. 아저씨말로는 북한과 남한 역사학자들이 세계문화유산에 이곳을 신청해 놓은 상태여서 한달 후에는 조사를 온다고 온 도시가 난리란다. 여기 오는 동안 내내 동네마다 길과 담장을 공사하느라 모두들 요란했다. 겉모습만 번지르르 하다.

나중에 우리나라에 와서야 세계문화유산 신청은 중국이 한 것이고 고구려를 변방소수민족의 역사로 자기네 역사에 편입시키기 위한 '동북공정'의 일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우리 방송사들조차도 집안에 들어가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는 사실도 돌아와서야 TV를 보고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할머니, 아이까지 낀 가족으로 그야말로 고구려 유적과는 관계없는 단순관광객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해안이와 엄마의 힘은 고구려유적지에서 여지없이 발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