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크레타 이라클리온에서 늘어지다

(1) 좋은 호텔, 크로노스

크레타 이라클리온 행 9시50분 비행기는 1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짐을 찾고 나와 택시를 잡아 타고 시내로 들어가니 어느덧 11시 30분.  택시기사에게 그나마 지도에서 본 거리인 한다코스 거리에 간다 말할 수 있었던 것이 무사히 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였다. 크레타 공항엔 뭐 변변한 여행 지도도 없었으니. 무거운 배낭을 지고 숙소를 찾고자  이곳 저곳을 헤메고 다녔지만 어째 숙소 비슷한 게 보이지를 않는다. 보이는 거라곤 무지 비싸 보이는 호텔뿐. 나중에 물어 보니 90-110유로 정도였었다. 1시간 반을 헤매다 보니 어느덧 1시. 이라클리온 구시가지를 뺑뺑 돌았나 보다. 간간이 마주친 사람들은 분수대 광장 부근에 숙소가 있을 거라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길에서 잠을 청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09_14-00-18.jpg마지막으로 택시타고 오면서 보았던 제법 근사한 호텔, 크로노스를 찾아갔다. 해안가 도로변에 불 켜 놓고 있어서 우연히 봤던 곳. 맘씨 좋게 생긴 주인은 경아씨랑 둘이 들어가니 방 있다고 45유로를 부른다. 그 때 해안이가 들어왔고 세명이란 것을 확인했지만 그냥 45유로를 달랜다. 고마운 아저씨. 방은 무지무지 깔끔하고 냉장고까지 갖추어진 호텔인데 값이 싸다. 이게 바로 비수기 관광의 묘미 아니겠나.

다음날 아침, 산책 겸 거리를 돌아다녀 본 경아씨가 몇 몇 숙소를 확인해 보더니 다른 데는 훨 좁은데도 값은 같거나 비싸단다. 아침에 내려가서 한 5일 있을 것이라고 흥정을 시도했지만, 주인은 자신의 호텔이 가장 좋고 싸다는 자신감이 있다. 전혀 흥정 안됨. 우리도 쾌히 오케이 했다.

(2) 겨울엔 산토리니 가는 배는 없어요.

크레타에 5일을 묵는 이유는 산토리니 때문. 아테네에 피레우스 항구에선 크레타-산토리니 간 배편이 없다 들었지만 혹시나 해서였다. 중심가 아우구스토 거리에 있는 미노안 라인에서 알아보니 역시나 배가 없다. 아니, 배가 있긴 있지만 출발항이 차로 3시간 거리이면서 크레타로 돌아오는 날짜도 우리 비행기 날짜와 맞지 않는 거다. 무작정 들어온 크레타에서 5일간을 늘어지게 쉴 일만 남았다. 유명한 유적이라면 크놋소스 궁전밖엔 없는데. 고고학 박물관 옆 여행안내소에서 5일간 있을 거니까 갈 곳좀 말해달라 하는데 여러 성당과 희랍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 크노소스 궁전, 고고학 박물관 말고는 마땅한 곳을 알려주지 못했다. 그나마 볼것 많기로 유명한 고고학 박물관은 리노베이션  관계로 휴관중.

(3) 먹고 살기에 아테네 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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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가 섬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섬이라서 먹을 것이 없을 것 같아 아테네 대형 슈퍼에서 각종 캔 음식을 바리바리 무겁게 싸온 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통감해야 했다. 가까운 거리에 시장이 있고,그 시장 안인 크노소스 가는 버스 정류장 근처 KOSMON 거리에는 제법 큰 슈퍼마켓도 있으며 물가 또한 비싸지 않다. 게다가 이라클리온 구시가지 곳곳에 1.5유로점(천원샵)이 있고 생활 도구와 악세사리 등등이 놀랄만큼 싸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위에서 말한 슈퍼 안에 그날 그날 조리된 각종 먹을 거리가 가득하다는 것. 매일매일 메뉴도 바뀌고 맛도 있는 데다 음식 한가지에 3.5-4.5유로로 먹을 만한 양을 주니 지금까지 아테네에서 먹었던 캔음식을 다시는 안먹어도 되는 것. 서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듯, 만든 음식은 잽싸게 팔려버려 오후 느즈막이 가면 팔다 남은 몇 가지 음식밖에는 없었다.

도착한 다음날 낮잠 한판 걸판지게 자고 나서 5시쯤 되어 슈퍼에서 오븐구이 통닭(6.8유로) 한 마리를 사다가 뜯기 시작했는데 이놈이 갑바가 얼마나 큰지 세명이 달려들어도 절반밖에 못먹었다. 우리나라 통닭의 약 2배 크기다. 오래 구웠는지 기름이 쫙 빠져 있고 뼈가 그냥 부스러질 정도다. 향긋한 후추향도 감돈다. 남은 것은 잘 싸서 다음날 먹기로 했는데 그다음날 슈퍼에서 중국식 칠리 소스를 샀더니 영락없는 초고추장 맛이 아닌가. 닭에 찍어 먹으니 맛 두배. 소스와 같이 먹으니 남아 있던 퍽퍽한 가슴살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먹힌다. 역시 소스가 있어야 고기음식이 맛있는 거다.

과일 값은 최고. 많이 먹게 되는 사과나 오렌지는 kg당 1유로 안팎이어서 매일 매일 과일을 뽀지게 먹어 댔다. 테살로니키에서 크레타산 오렌지를 먹어 보고 맛에 반했었는데, 이곳이 바로 그리스의 오렌지 주산지인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나는 술값에 또 반한다. 지방맥주는 0.5L 큰 병에 1유로 이하, 수입맥주는 1.3유로 정도인데다 터키에서 소주한병 크기에 7000원 정도였던 라키가, 이곳에서는 우조라는 이름으로 팔리는데 0.7L로 5유로 정도 하니 반값 이하다. 지역 포도주 역시 싸서 1유로 정도다. 이곳 사람들, 술 무지 좋아하고 많이 먹나 보다. 슈퍼에서 맥주 여러 캔을 사서 냉장고에 두고 식사 후에 시원하게 마시니 신선 놀음이다. 모든 유럽인들의 꿈의 섬 크레타에서 늘어지게 쉬게 되었군.

(4) 크노소스 궁전과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역

슈퍼에서 점심 거리로 무사카 사 들고 크노소스 궁전으로 향했다. 2번 버스로 약 20여분 거리. 버스비는 구간에 따라 0.75유로와 1.1유로다. 크노소스 궁전까지는 1.1유로. 크노소스 궁전 입장료는 어른6유로, 어린이 무료다. 입장권 모양을 보니 국립박물관인데, 그렇다면 일요일엔 무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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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소스 궁전은 단일 건물 구조로는 상당히 컸다. 이 궁전이 바로 소 머리를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미로라고 불리는 바로 그 궁전이다. 많이 허물어지긴 했지만 복원 작업이 활발했고(사실 복원 한 부분이 좀 허섭스럽다) 대강의 궁전 내부 구조를 알 수는 있게 유적이 남아 있어 유적 사이를 거닐면서 옛날의 영화를 떠올리기엔 충분하다. 석영질의 암석이 켜켜이 붙어 있는 것이라든지, 석회암이 물결 모양으로 부식된 것이 다른 곳의 토질과는 달랐던 점도 특이하다. 이 유적들이 기원전 14-15세기의 유적이라니 믿을 수 없이 정교하다.

버스가 30여분 마다 한 대씩 있는데, 유적지를 나와 무사카 시식을 하고 나니 바로 버스가 왔다. 도착한 버스터미널에서 다른 지역으로 가는 시간표를 챙기고 버스 안에서 시내버스 시간표와 노선표를 챙긴 후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소로 (3번 버스). 묘소와 가장 가까운 성문에 내려 걷는다. 이제는 들꽃으로 뒤덮여진 성벽이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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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길에 카페에서 노인네들이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는 품이 참 보기 좋아서 우리도 커피 한잔씩 했다. 지역 노인네들 오는 카페에 낯선 외국인이 들어오자 주인이 특히 반긴다. 다들 주로 커피 한두잔 시켜 놓고 한참을 이야기 하거나 주인장과 농담하거나 하신다. 한가로운 동네 커피점. 젊은이들은 도심지의 비싼 카페에서 신식 커피를 마시지만 이런 동네 카페에선 가루를 물에 끓여 진하고 작은 잔에 내 오는 그리스식 커피를 마신다.(1유로) 우린 이게 더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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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아름다운 영혼, 자유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소는 성벽 위에 소박한 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올라 서면 시내가 한눈에 들어 오며 편안하고 시원한 느낌이다.묘지에는 묘비명도 없이 나무 십자가와 무덤 뿐. 고적한 느낌에 한국식으로 절 두 번 하고 나았다. 해변 거리에 있는 크레타 역사박물관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집필하던 서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곳부터 해안가에 있는 숙소까지는 지도상으로 먼 거리 같았지만 동네동네 꼬불거리며 가다 보니 얼마 안가 분수광장이 보인다. 이라클리온 구시가지, 참으로 작구나.

(5) 베네치아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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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성벽들. 왼쪽은 방어를 위해 바다앞으로 나선 요새, 오른쪽이 성벽

베네치아 성벽 양식은 둥글게 도시를 감싼 뒤 군데군데 화살표 묘양으로 치(방어용 건물구조)를 만든 것이 특색이다. 이 크레타 섬 전체가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아 그들이 만든 견고한 성벽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데, 점령자가 그들을 위해 쌓은 요새위에 세월이 흘러 피점령자였던 그리스 국기가 나부끼고 오히려 그나라의 관광유산이 되었으니 아이러니컬하다. 요새를 지을 땐 이 땅을 다시 빼앗기지 않으려고 지었겠건만.  빼앗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무상한 일인가.

(5) 레팀논으로

크레타 제 2의 도시 레팀논으로 가기 위해 항구 앞 버스터미널로 가니까 차 한대가 출발준비를 하고 있으면서 차장아저씨가 레팀노! 하고 소리친다. 표사러 들어가려니 버스 안에서 사라고 빨리 타랜다.

버스 안에서 예쁜 아가씨 차장이 우리 셋의 표를 주면서 19유로를 달랜다. 주고 나니 19유로짜리 돈표를 주네. 하지만 3인분이 19유로? 뭔가 계산이 안되는데? 돌아올 때 알게된것은 6.5유로씩 19.5유로인데 0.5유로를 그냥 깎아준 거란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가 익숙한 대로 버스 안에서는 오렌지를 까 먹자 버스안에서 음식을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다가와서 손짓으로 알려준다. 과연, 아무도 뭘 먹고 있지 않았고 바닥도 카펫으로 깔 려 있어 공감하긴 했다. 하지만 우린 몰래 과자를 먹긴 했다. ^^ 그런데 이부분,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정말 껄렁한 자세로 뒷자리에 앉아 과자를 먹던 아가씨에 대해선 남자 차장이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 안하더군.  깐깐한 아가씨와 설렁설렁한 총각의 차이일까?

지나치는 풍경은 황량하고 장대하다. 산에 간간이 보이는 건 관목인 올리브 나무와 오렌지 나무 뿐. 절반 정도의 산은 나무 하나 없이 황량한데 해안가에 바위산이 거대하게 펼쳐진 풍경은 마치 바이칼을 연상케 한다. 이런 곳에서 고대 문명이 일어나는 것이로군. 호연지기를 강하게 느낄 만한 풍경이지만 막상 땅은 척박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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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팀논에도 역시나 베네치아 지배하의 성채가 남아 있다. 바다를 보며 지은 큰 성채는 역시나 지금은 관광 자원. 요새 없엔 고고학 박물관이 있지만 단층으로 하나의 홀로 되어 있는 소박한 곳이다. 각종 석상이나 석관등의 유물이 보호시설 없이 놓여져 있어 보존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매표소 건너편엔 학예사들의 작업실이 빠꼼이 열려 있었는데 각종 돌 부스러기와 그릇 조각들이 가득하다. 학예사란 직업은 그런 조각들을 어떻게든 짜맟주�?역사를 조립하는 퍼즐작업이지만 천신만고 끝에 퍼즐 조각을 맞추어 하나의 작품을 복원했을 때의 기쁨이란 말로 하기 힘들것 같다.

요새를 돌아 해변을 따라 걸으니 거의 1시간만에 구시가지를 한바퀴 돌게 된다. 작은 도시. 레팀논 관광안내소 (해변에 있다)에서 안내지도를 받아 들고 보니 트레킹, 동굴 탐사 등 레팀논 인근 자연관광에 대한 정보가 많다. 시간이 많은 진짜 여행자라면 저런 것들을 해 보겠지?

버스터미널 옆에는 대형 슈퍼 참피온이 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전자제품이 조금 더 많은 것일 뿐 아라클리온에서 우리가 자주 가는 슈퍼보다 그리 나은 것도 없네.  여행자에게는 대부분의 상품이 그림의 떡. 매장의 전자제품은 까르푸와 계약된 회사인 Firstline (중국)것이었는데 이 제품들은 우리나라 까르푸에서도 익히 본 것이라 글로벌화 되어가는 세계 경제의 한 면을 보여주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