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자유로운 예술의 도시, 바르셀로나
에스파냐를 여행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의 큰 부분은 바르셀로나, 그것도 천재건축가 가우디 때문이었다. 대한항공의 광고에선가 에스파냐를 여행하는 상상 속에 나왔던 그 성당, 그리고 그가 남긴 상상하기도 힘든 독특한 건축물들이 어떻게 도시와 조화를 이루면서 존재하는지 정말 궁금했다.
게다가 바르셀로나는 까딸루냐지방의 수도이며 스페인 내전때 프랑코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려던 공화파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당시 프랑코를 지원했던 마드리드와는 지금도 상당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저항의 도시가 아닌가. 타민족에 대해 별다른 폭력적 수단을 사용할 수 없는 민주주의 시대에 그런 민족감정을 대놓고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축구인데 바르셀로나 FC가 다른 팀과의 경기에 지는 것은 괜찮지만 레알마드리드에게만은 뒤져서는 안된다는 그 감정. 그건 마치 예전 우리나라 사람들이 축구 한일전에서 절대 질 수 없다고 말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저항정신과 기괴한 가우디의 건축 사상이 어쩐지 맞아떨어지는 듯한 곳 바르셀로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바르셀로나 하면 92년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로 피날레를 장식했던 곳이기도 해서 이래저래 관심이 많이 가는 곳이다.
가우디의 건축물
첫 날 기행을 시작한 곳은 까싸 밀라였다. 1895년 바르셀로나 신도시계획에 따라 가우디의 설계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며 연립주택 용도로 만들었다 하는데 그 외형을 보고 있노라면 누가 거기 들어가 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평범한 이의 시각으로는 건물이 마치 거리를 노려보는 듯 한 모습이어서 기괴했고 철제로 만든 발코니 장식은 사방이 날카로워 실용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건물을 만들 생각을 한 이는 정말 골때리는 인간이구나. 상상력을 가감없이 온전히 실제 건축물에 투사하다니...
하 지만 이상하다. 그 기괴한 건축물이 주변 건물의 모습과 큰 이질감없이 어울리는 게 아닌가. 이런 안정감있는 느낌은 그라시아 거리를 걸어 내려오며 만난 가우디의 또다른 건축물인 까싸 바뜨요를 보면서 더욱 자연스러워졌고 가우디의 건축이 아닌 다른 건물조차 그 나름의 색깔을 분명히 하며 거리에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의 압권은 그라시아 거리의 끝인 까딸루냐광장에 있는 엘코르테스 잉글레스백화점이었는데 이 건물은 반대로 지나치리만큼 밋밋하여 이 건물 하나로는 별다른 특징을 느낄 수 없지만 다른 개성넘치는 건축물과 함께 어울리고 보니 지나치게 밋밋한 것 역시 자신의 개성이 되는구나 하는 역설이 만들어졌다.
오 후에는 바르셀로나의 상징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보았다. 지하철에서 내리는 그 순간 맞닥뜨린 그 충격. 이미 여행전부터 인터넷 이미지를 통해 익히 보아온 건축물이지만 막상 마주대하고 보니 경외롭기까지 하다. 긴 옥수수자루 모양의 네 첨탑과 뭔가 불길한 느낌이 나게끔 각지게 조각한 수난의 문.
수 난의 문에 새겨진 로마병정의 모습이 익숙해서 기억을 떠올려 보니 까싸 밀라의 굴뚝 모양과 동일했으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거신병의 모습과도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당 내부에서 보니 기둥은 마치 키큰 나무가 가지를 뻗치는 듯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성당 안이 숲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당을 자나와 뒤쪽으로 빠졌는데 뒤쪽은 앞쪽과는 판이하게 콘크리트를 마구 떼어서 붙인 듯 했고 조각상은 모난 부분이 없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마지막 코스인 성당 박물관에 가서야 가우디의 건축 사상이 자연을 최대한 닮게 하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마치 가지가 마주나듯 마주나게 만든 기둥이 이해되었고 자연에서의 꽃 받침이 나선형으로 쌓이듯 가우디의 건축물에도 그런 면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건축이란 게 인간이 만드는 것이라 자연을 거스르면서 만들어질 수 밖에 없을 거라고 믿었던 내 자신의 생각이 짧았던 만큼 가우디의 건축물에 충격을 받은 것이리라.
이토록 완벽하게 자연을 닮은 건축물을 만들 생각을 했다니. 괜히 천재가 아닌 거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도 아마 이전에 이 건축물을 보고 거기서 영감을 얻었을 거다. 성당 안에 있노라니 내가 마치, 나우시카에서 오염된 자연을 정화하는 역할을 맡았던 부해의 밑바닥에 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느꼈으니까. 하지만 이 엄청난 건축물은 아직도 활발히 공사중인 상태다. 100년전 가우디의 지휘에 따라 성당을 건축했던 인부들이 지금 현재는 최신 설비를 갖춘 공사장과 인부들로 대체되었을 뿐. 성당 안은 공사판 그 자체였다. 가우디의 건축 철학을 살리려면 아직도 약 몇십년은 더 공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가우디는 단지 후세에 까지 엄청난 짐을 안긴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진정한 건축이란 어떤 것이어야 할 지 물음표를 남긴 것일까.
이런 멋진 건축물을 설계한 사람도 대단하지만 그런 건축물을 최소한 인정할 수 있었던 당시 시민들의 열린 생각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지금까지 그 정신을 이어받아 도시를 디자인하는 현재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생각이 무척 멋스럽게 느껴진다.
디자이너의 재치
마지막날 저녁, FC바르셀로나의 홈 구장인 누캄프까지 걸어서 오는 길에 현재 바르셀로나 도시디자이너들의 재기넘치는 흔적을 찾았다. 우연히 지나친 브라질 거리는 도로 한 가운데가 거대한 보행자 공원으로 되어 있었고 도로의 양끝단 2차선 씩만으로 차가 지나다니게 된 구조였는데 도로와 보행자 공원에 서 있는 가로등과 벤치들이 너무나 재미있는 게 아닌가. 어떤 가로등은 가로수인 종려나무를 닮아 있고 어떤 가로등은 옆으로 놓이고 어떤 것은 앞으로 놓이고 어떤 녀석은 가로등의 불빛이 두개인 것 등등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다. 가로등들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우리는 다 똑 같은 가로등이 아니야!"
물 론 단순하게 배치를 달리 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이 걷는 동선에 따라 치밀하게 그 위치가 배치되어 있거나 필요한 곳에 더 많은 조명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를 구상하는 데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인가. 실용 구조물에까지 이렇게 주변환경과 인간을 배려하는 모습이 느껴지니 바르셀로나는 단순히 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설치작품 전시장이라 해도 될 것 같았다.
바르셀로나에 갈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나치는 실용구조물 하나하나에도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게 좋겠다. 버스도 예사롭지 않고 전철 역시 그러하며 건축은 두말할 나위도 없으니까.
바르셀로나를 기행하면서 이 지역의 자유로운 정신이 잠깐 이곳을 지나쳐가는 여행자에게까지 온전히 전해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후안 미로와 가우디, 살바도르 달리, 피카소 등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들이 왜 이 바르셀로나에서 등장하게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바르셀로나 (에스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