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카사블랑카
도시에 대한 환상과 첫 느낌
I felt in love with you watching Casablanca....
멋진 이름이었다. 여행 전 경로를 짜면서 모로코에서 베니스나 로마로 날아가야겠는데 어디면 좋을까 하다가 가장 끌린 이름이 바로 이곳 카사블랑카. 영화의 무대로나 노래제목으로나 이미 많이 알려진 곳이면서 뭔가 환상을 품게 만드는, 이름이 예쁜 도시다. 이 이름에 끌려 베니스로 돌아가는 비행기의 출발지를 덜컥 이곳으로 정한 거다. (출발지를 마라케시로 정했으면 여행 진행 경로상 훨씬 합리적이었을텐데 말이다.) 덕분에 페스에서 마라케시까지 8시간을 갔다가 갔던 길을 다시 돌아와 카사블랑카에 마지막으로 당도하게 되고 말았다.
아마 이곳을 찾는 많은 이들이 나처럼 영화나 노래와 관련한 멋진 환상을 품고 올테지.
카사블랑카는 모로코의 타 도시들과는 달리 상당히 유럽화 되어 있고 번화한 모습이다. 원래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프랑스 식민지 시절 서구식의 건축물들이 속속 지어지면서 번성하기 시작해 식민지시대의 수도 역할을 했던 곳이면서 현재 모로코의 경제적인 수도로서 모로코 젊은이들의 와서 살고 싶어하는 꿈의 도시라 한다. 단지 번화한 대도시라서 당연히 옛적으로부터의 문화 유적이랄 것은 없으며 대부분의 건물이 19세기에 지어진 것이다. 이곳에서 볼 거리란 19세기 프랑스 건축가들에 의해 지어진 아르데코적인 건축물들이라고는 하는데 사실 난 그 말이 뭔지 모르니, 봐도 머릿속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중앙 도심에서 보았던 법원 건물 처럼 거대하면서 서구풍인지 아랍풍인지 모르게 건축양식이 혼합된 것을 아르데코라 하나? 분명히 서구의 건축물이면서 약간씩 느낌이 다른 건축물들이 보이긴 했다.
도시의 느낌은, 유럽같은 겉 모습이되 인도와 같은 분위기랄까. 거리를 걸으면서 잠깐씩 모로코가 아니라 인도에 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검은 피부보다는 구릿빛의 아랍인들이었고 오토바이와 오래된 버스들로 인한 자욱한 매연 하며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는 차들의 흐름. 건물들이 많이 낡은 게 보이고 거리가 전반적으로 경음기로 시끄럽다. 특히 아쉬운 건 지저분한 거리의 바닥들. 대도시 답지 않게 오물들이 고여 있는 모습이 많이 보였고 길에 쓰레기도 많았다. 물론, 길에 쓰레기가 많은 건 유럽도 마찬가지지만 최소한 그들은 밤중에 거리의 쓰레기를 치우는 도시운영 시스템이 있어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지저분해 지지는 않는 반면 여기는 그런 시스템이 잘 운영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한 눈에도 오래 묵은 쓰레기들이 보이는 걸 보면 말이다.
개중 아주 깨끗한 거리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Novembre 광장에서 남쪽으로 연결된 보도인 Prince Moulay Abdella도로였는데 이는 도로 가장지리에 위치한 상점에서 가게 앞길을 꾸준히 치운 결과다.
메디나 Medina
아랍권 도시들에는 어디나 도시의 중심지로서 성곽에 둘러 싸인 중심지인 메디나가 있다. 그리고 메디나의 외곽에는 메디나를 방어하는 요새인 카스바 Kasbah 가 있고. 도시는 이 메디나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으므로 이곳은 가장 번화한 중심지가 됨과 동시에 현대화 되지 않아 과거의 건축양식이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보통 아랍권의 도시에 처음 발을 딛는 여행자는 일단 이 메디나를 찾아서 이동하면 숙소를 찾거나 관광을 하는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곳 카사블랑카에도 메디나는 있지만 다른 도시들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중요하지 않은 작은 어촌이었기에 메디나를 지키는 카스바도 없고 메디나의 외곽으로부터 도시의 발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메디나는 단지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섬과 같은 존재로 보인다. 도시의 모든 볼거리는 메디나 외부에 있고 잘 뻗은 길과 유럽과 같은 모습에 인파로 북적이고 있지만 메디나 안쪽은 시장과 주거지역으로 되어 있고 상당히 복잡하고 좁은 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타 도시의 메디나가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곳이라면 이곳은 현지인들의 삶의 터전이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메디나를 가로질러 북쪽 항구 방향으로 가는 동안 공동수도라든지 동네빵집, 동네 시장들 까지 소소하게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간간이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의 친절한 인사도 덤으로 함께. 저사람들의 눈엔 우리가 어떻게 비칠까? 동네 한복판에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
누벨 메디나 Nouvelle Medina
메디나를 거닐다가 북쪽 문으로 나왔는데 도로 숙소까지 돌아가기는 조금 먼 거리라 마침 56번 버스가 오길래 무작정 잡아 탔다.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오지 하는 생각으로. 복잡한 버스안의 할아버지께 자리를 양보해 드렸더니 할아버지께서 참 흐뭇해 하시면서 버스가 가는 길 이곳저곳을 가르쳐 주신다. 물론 프랑스어지만 길 이름쯤은 들리니까 대강 버스가 가는 위치 정도는 잡기에 쉬웠다. 그런데 얼마 가자 할아버지께서 로얄 팰리스 뭐라뭐라 하신다. 차창 밖을 보니 꽤 근사한 미나레(모스크의 탑)가 서 있는 게 보여서 할아버지께 인사하고 내린 곳이 누벨 메디나다. 신도시쯤으로 번역되겠지.
왕궁은 페스에서 보았던 것 처럼 경비군인이 지키고 있어 접근할 수 없었지만 미나레를 목표로 걸어가는 길 양쪽으로 회랑이 만들어져 있고 전통의상이나 도구들을 파는 상점이 쭉 도열해 있었다. 상점가를 지나니 아랍양식의 큰 문이 있고 큰 건너편은 모스크가 있는 작은 거리다. 카사블랑카의 도심에서 느낄 수 없는 한가로움과 전통 아랍 스타일의 건축물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 따뜻한 분위기가 풍겼다. 잠깐 분위기를 느껴 보고 있노라니까 항상 우연히 가게 된 곳이 더 좋은 추억이 되더라는 우리 여행의 정석이 생각났다. 항상 그랬다. 무작정 버스를 잡아타고 가다가 좋은 풍경 나오면 내려서 느낌 받기. 그게 정해진 명소를 순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기억에 남더라.
놀라운 카사블랑카 레스토랑의 타진 Tajine
타진은 모로코식 뚝배기 요리다. 내가 감탄한 양고기 타진은 마치 양고기찜같은 요리인데 뚝배기에 양고기찜이 달콤한 말린 자두와 함께 나왔다. 자두의 맛이 양고기에 깊게 배여 진한 곶감의 맛과 같이 강한 단맛을 내면서도 불쾌하지 않고 입맛을 끈다. 그리고 일반적인 갈비찜에서 느낄 수 없는 살짝 불에 그을린 듯한 향이 배여서 자꾸만 그 맛을 음미하게 된다. 여운이 짙게 남는 맛이면서 상당히 혀에 자극을 주는 맛이긴 한데 왠지 끌리는 느낌의 맛. 이런 고기찜은 처음이다.
마라케시에서 다시 만난 요시츠-타마미 부부가 꼭 가서 먹어보라 했던 이 레스토랑의 자두양고기찜. 그들의 추천 이상의 감동을 이 요리에서 받는다. 마라케시에서 감명 깊게 먹었던 양머리 수육이있지만 그게 단지 우리나라 음식과 유사한 느낌 정도만을 주었다면 이 요리는 독특한 모로코 요리의 느낌을 팍팍 전달해 주는 개성이 있다. 아마 이 음식이 아니었다면 모로코의 요리에 대해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미 맛보았던 페스나 마라케시에서의 타진은 이와 같은 특출난 맛이 아니었으므로.
요시츠씨 부부에게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다. 카사블랑카를 우리 기억에 남는 도시가 될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카사블랑카란 이름
헌데, 카사블랑카란 이름은 19세기 스페인이 잠시 이곳을 점령했을 때 붙인 이름이다. 스페인어로 까사(Casa:집) + 블랑카(Blanca:하얀). 그러니까 하얀집.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여행할 때 많은 건물에 Casa 라는 이름이 붙었던 것을 기억해 내고 나니, 까사블랑카가 하얀집 이라고 해석되면서 뭔가 갑자기 환상이 깨지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예전에 이곳에 하얀 집이 많았었나? 아니, 하얀집이라면 스페인 남부 어디서나 보이는 풍경인데? 물론 우리에겐 목가적인 풍경이지만 그들에겐 아주 흔한 일상일 뿐이란 걸 생각해 보면 그들이 붙인 까사블랑카란 이름이 더욱 재미없게 느껴지게 된다.
그런데 요즘 들어 유럽식으로 붙였던 도시이름이나 길 이름을 아프리카 식으로 바꾸는 일이 한창이라 하는데 까사블랑카 역시 아프리카식으로 바꾸어 Dar-el-Bäida 로 부르고 있다니 잘 된 일이다.
카사블랑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