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산본쪽 수리산 산책

어제 아이들 데리고 국립박물관에 다녀왔다. 그냥 다녀온 게 아니라 징허도록 힘들게 다녀왔다. 3시면 돌아 올거라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었는데, 4시30분에야 돌아온 거다. 이유는? 덕진이의 사고 때문에.
물론,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 덕택에 큰 일은 없었지만 마음고생을 좀 했는지 오늘은 아침부터 피곤했다.

토요일엔 산에 가야 할텐데, 아침엔 해안이 사생대회 참가시키느라 양지공원 갔다 왔고, 간만에 목욕을 하러 나갔던 산본에는 산본센터사우나가 없어져서 114의 도움을 받아 산본시장 근처 목욕탕에서 가까스로 목욕을 마치고 오니 벌써 1시 반이다. 오늘은 그냥 제칠까 하다가 그래도 움직여야지 하고 맘 먹은게 3시. 이번엔 좀 다른 곳으로 가볼까 하고 구글맵으로 수리산을 뒤졌지만, 안양가는 길이랑 전 주에 올라갔던 길 빼고서는 마땅한 등산로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수리사 안쪽으로 들어간다면 나오는 교통편이 거시기하고. 어딜 가나...

구글맵을 접고 단풍이나 보자 하고 무작정 나가보기로 한다. 대략 산본 2단지쪽으로 갈까 하고 사진 장비를 챙겼는데, 처음엔 50mm 렌즈와 300mm 망원을 챙겼었지만, 이 늦은 가을 뭔 찍을 만한 꽃이 있으랴 싶어 50mm 는 그냥 뒀다. 배낭에 식혜랑 과자랑 챙기고 먼저 넣어 두었던 300mm렌즈를 다시 사진기에 붙이고 길을 나섰다.

4호선 산본 가는 전철길을 따라 걸으면서 시작한 산책. 지금까지 꽤나 자연을 잘 보존했었던 대야미지만, 요즘 아파트 짓기가 한창인데다가 반월쪽 가는 직통도로를 만드는 중이라 분위기는 어수선 그 자체다. 다행인 점이라면, 우리가 걷는 도장터널 가는 길이 평행해서 나고 있는 직통차도 덕분에 사람들의 왕래가 뜸해져서 수풀로 우거졌다는 점 정도일까.

새로 난 도로가 자연을 파괴하는 동안 예전의 오솔길은 자연이 잠식한다는 고마운 사실. 그래선지 걷는 길이 좀 더 재미있다. 게다가 사람의 왕래가 뜸해서인지 예전에 보이지 않던 들꽃들이 보인다. 내가 막 경아씨에게 이렇게 말했던 시점.

바로 그 때 경아씨가 길 가에서 달맞이꽃을 발견했다. 내가 달맞이꽃의 자태를 담는 동안 앞서가던 경아씨는 쑥부쟁이도 찾았다. 그것도 흐드러진. 올가을, 예쁜 쑥부쟁이를 멋지게 담지 못해 안타까웠던 내게 오늘은 예기치 않던 선물이 쏟아진 셈. 쑥부쟁이가 이렇게 사람 다니는 길가에 흐드러진 걸 본 건 처음이다.

쑥부쟁이는 길가 이곳저곳에 흐드러진다. 내가 좋아하는 꽃 중 상위를 차지하는 이 녀석은 가을에 만날 수 있는 선물이다. 하지만 접사로 찍지 않으면 보잘것 없게 보일 정도로 작은 꽃이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꽃이기도 하다. 몇년 전 가을에 쑥부쟁이를 맛깔나게 찍은 뒤로 가을이 되면 기다려지는 꽃.

쑥부쟁이를 담고 나서 조금 더 걸으니 이번엔 예쁜 단풍이 기다리고 있다. 뭐, 단풍놀이 하러 먼데까지 나갈 필요도 없네. 이리도 예쁜 아이들이 숨어 있는데. 사진으로 담아 놓으니 초록,빨강,노랑이 어우러져서 색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경아씨는 바탕화면으로 삼고 싶다면서 빨갛게 익은 단풍을 담아달라고 한다.

단풍을 담고 나서 다시 한가롭게 걷는 길. 도장터널길로 접어들면서 예쁜 산국을 발견하고 사진에 담고 있는데, 경아씨가 뒤에서 깜짝 놀란다. 배낭에 넣어두었던 식혜가 흘러서 배낭 밖으로까지 새어 나오고 있는 중. 난 윗옷의 뒤부분이 젖고 있었지만 전혀 느끼지 못했다. 배낭을 열어보니, 오노!! 배낭 밑바닥에 식혜가 흘러 찰랑찰랑한다. 여기다 렌즈를 넣어 왔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까 아까 집에서 렌즈를 두고 온 순간의 선택이 어찌나 다행스럽던지. 생각지도 못한 꽃을 찍게 되어서 50mm 렌즈를 못 챙겨온 게 아까는 아쉽더니 이젠 복이 되는구나.

도장터널 근처에서는 외지사람들이 주말농장을 꾸리는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그분들에게 물 좀 쓰자 요청하니 선선히 허락해 주신다. 마침 배낭안엔 과자봉지같은 것 밖엔 없어서 큰 문제는 안생겼다. 잠깐 동안 어쩌나...집으로 돌아갈까 했었는데, 우리는 언제나 재수가 좋은 사람들. 어디서나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나온다.

주말농장을 지나 언덕으로 올라서는 길이 대야미에서 군포로 가는 도장터널 왼쪽 언덕이다. 잠깐 오르니 산본에서 슬기봉 가는 등산로와 만나게 된다. 이 길은 이렇게 올라가는 덴 문제가 없지만 다시 돌아올 때 찾기 힘들 정도의 샛길이다. 여기서 산본쪽으로 가면 만나는 게 수리산 자락의 마지막인 감투봉. 맞은편의 슬기봉이나 태을봉, 관모봉은 제법 높고 탁 트여 있어서 제법 봉우리다운 느낌을 주는데 이 감투봉은 그냥 야트막한 언덕 분위기가 난다. 이제 구릉으로 변해 산본을 감싸안는 마지막 손가락 부분이랄까. 하지만 이쪽에서 보는 반대쪽 봉우리는 정말 멋지다.

수리산이 전국 100대 산 중 45위의 인기산이랜다. 그만큼이나 되나 하고 신기했었는데, 경아씨의 일침. 신도시라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아니겠어? ^^

능선을 따라 금정중학교 쪽으로 이동하니 산본쪽 아래서 무슨 행사를 하는지 운동장이 시끄럽다. 산 속이되 산에 온 분위기가 안나는 널따란 산책로인데다 도시의 소음이 그대로 전해 오니 고즈넉한 맛은 없다. 가끔씩 산악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쌩쌩 달려서 비켜서기도 했는데 조금은 불만스럽다. 산이고 하천 둔치고간에 차를 피한 곳에서도 요즘은 자전거를 피해야 한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인식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선 시기상조인지.

너무나 한가롭게 걸었던 때문일까? 밤바위를 지나 운동장 끄트머리 탁트인 바위위에 올라서니 어둑해진다. 이곳에서 보는 산본의 야경이 멋지다던데, 확실히 그 말은 옳다. 이곳에서 보면 산본을 폭 감싸고 있는 수리산의 형세가 그대로 보이면서 산본이란 도시가 얼마나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는지 실감난다. 그리고 그 감싸는 손길 수리산이 얼마나 소중한 산인지도 동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