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홈 :: 2013 발칸/동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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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목) 두브로브니크 - 모스타르(보스니아) 게바라 : 아침 6시에 일어나 짐을 쌌다. 아줌마 집을 깨끗하게 정리해 주고 쓰레기도 분리수거하여 내 놓았다. 물론 이곳은 분리수거 개념이 없는 듯하다. 7시 20분에 올라가 준비가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5분 후에 아줌마 차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간다. 실바 아줌마의 외동딸은 대학생. 우리와 같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없던 대학 학비 부담이 큰 듯. 자그레브로 유학 보내면 생활비까지 2배가 든단다. 한국도 대학 학비가 많이 드냐고 물으신다. 세계 최고라고 했다. 아줌마는 북유럽의 복지 정책을 부러워하신다. 인간의 탐욕이 문제라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 정도가 필요하단다. 모스타르에서 일어난 일도 대충 얘기하시며 끔찍하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우리와 생각이 비슷한 분이다. 모스타르에서 잘 거면 리나 호스텔이라는 곳을 안다고 소개해 주신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덕분에 잘 쉬었다. 짐값은 8쿠나(1600원) 씩이다. 나머지 돈을 재환전하여 8유로를 받고 동전은 감자 칩을 샀다. 꼬또르에서 같이 탔던 일본 애를 또 만났다. 일일 관광가는 한국인도 있다. 대형버스는 절벽 지형을 끼고 돌며 올라간다. 날이 흐려서 바다가 예쁘게 보이지는 않는다. 국경 뛰어넘기 오늘은 국경을 넘나드는 체험을 하는 날이다. 크로아티아를 출발하여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다시 보스니아로 간다. 왜냐하면 중간에 해안가 20km는 보스니아 땅이기 때문이다. 신기하게 크로아티아 출국 후 보스니아 입국은 생략한다. 보스니아 휴게소에 들렀다. 마르크와 유로를 같이 쓰기 때문에 1유로를 냈더니 거대한 빵 한 덩어리를 준다. 2마르크가 1유로로 고정 환율이다. 빵은 구수한 누룽지 맛이 나고 속은 부드럽다. 다시 보스니아 출국은 없고 크로아티아 입국, 스플리트와 모스타르 가는 길이 갈린다. 크로아티아 출국하는 곳에서 국경 경찰이 왔다가고 다시 보스니아 경찰이 연이어 들어와 여권을 확인한다. 도장을 안 찍어 준다. 신기한 일이다. 보스니아의 네레트바 강을 따라 거슬러 오른다. 집들이 전반적으로 낡고 초라했다. 구소련 시절의 가옥을 연상시킨다. 모스타르에 접어들면서 번화해지고 대규모의 건물들이 보인다. 11시 반에 도착했다. 터미널에는 실바아줌마의 전화를 받았다는 리나 호스텔 아줌마가 나와 계셨다. 오후에 사라예보로 가려 했는데 비는 내리고 남편은 감기로 목이 많이 아프다고 하니 따라가 보기로 한다. 아줌마차로 숙소에 간다. 시내에는 건물이 폭격 맞은 채 방치되어 있기도 하고 총자 국이 난 것도 많다. 물론 새 건물이 많이 생겼다. 숙소 앞에는 1992년에 죽은 사람들이 가득한 묘지가 있다. 내 나이보다 어린 사람들도 많다. 아줌마가 이런 묘지들이 곳곳에 많이 생겼단다. 실바의 집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숙소지만 20유로에 주방도 쓸 수 있다. 우리 외에는 스위스 여자애 한명 밖에 없다. 남편은 몸도 아프지만 신발이 비오면 홀랑 젖는 매쉬 재질이라 오늘은 쉬어야 한다. 젖으면 신을 빨아 말려야 한다. 내일 아침 6시 차를 타겠다고 했더니 5시 20분에 픽업해 주신단다. 이런 서비스가 기본인가 보다. 사온 빵에 터키 치즈 카이막을 발라 먹고 소시지 볶음도 함께 먹는다. 아나키 : 두브로브니크에서 모스타르로 가는 길 사이에 보스니아 영토를 20km 정도 지나고 다시 크로아티아로 들어온 뒤 얼마간 달리다 보스니아로 넘어가게 되는 무척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 곳이다. 버스가 보스니아 국경에 도달하자 크로아티아 국경경찰이 여권을 확인한다. 보스니아 영토를 횡단하여 다시 크로아티아 국경에 도착하니 다시 크로아티아 국경경찰이 여권을 확인한다. 크로아티아 영토를 달려 마지막으로 보스니아에 진입하는 국경에서는 먼저 크로아티아 경찰이 여권을 확인하더니 보스니아 경찰이 따라 들어와 여권을 확인한다. "확인"만 한다. 도장은 안찍고. 이게 뭔일인가? 보스니아의 모스타르에 도착해 여정을 풀었지만 내 여권엔 보스니아 입국 도장이 없다... 만일을 대비해 경아에게 버스티켓을 보관해 두도록 일러 두었다. 저녁에 같은 호스텔에 묵고 있는 스위스 처자에게 물었더니 자기도 지금 보스니아 들락날락 히는 데 도장이 없다고. 하긴, 현지인들은 여권 대신 아이디 카드를 내는 걸로 국경심사를 대신 하는 것을 봤으니 출입국 도장 찍는다는 개념이 발칸반도국들 사이에서는 희미한 건지. 리나 호스텔 모스타르에서 내리니 중년아줌마가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실바 아줌마 전화를 받았던 리나 호스텔의 아줌마다. 우린 잠깐 구경하고 곧바로 사라예보로 올라갈 예정이었지만 몸 상태가 너무나 안좋아서 일단 하루 쉬다 가기로 맘먹었다. 이틀 연속 비를 맞으며 등산을 해서인지 어제 저녁부터 눈알이 빠져나갈 정도로 아프다가 오늘아침부터는 숨 쉬기만 해도 목이 따끔거리고 두통도 심해졌다. 차에서 잠을 청해 봐도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다. 목 감기에 된통 걸린 거다. 아줌마가 운영하는 리나호스텔에 짐 풀고 stari most(old bridge)를 보러 구시가로 갔다. 시가지에 자동차 매연과 알 수 없는 매캐한 냄새가 목을 심하게 찔렀다. 숨을 못 쉬겠다는 느낌이 드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스타리모스트 구시가는 여기 말로 stari grad(old city). 해석해 놓으면 별 것 아니지만 이곳 말로 하면 어감이 참 아름답다. 스타리모스트도 모스트가 '다리' 라는 뜻이니 단지 '옛 다리'라는 재미없는 의미다. 의미를 모르고 소리로만 부르면 아름답기만 한데. 이곳, 모스타르는 가톨릭과 무슬림이 평화롭게 공존하였던 곳이고 가톨릭 구역과 무슬림 구역을 잇는 스타리모스트가 두 지역의 평화공존의 상징이 되었던 곳이다. 보스니아 전쟁 때도 두 진영이 힘을 합쳐 세르비아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중에 가톨릭인 크로아티아계가 무장을 하고 모스타르를 장악한 후 크로아티아 공화국과 병합을 추진해 나가게 되었고 당연히 무슬림인 보스니아계의 강력한 반발을 가져와 1993년 봄 내전에 돌입했다. 크로아티아 방위 평의회군이 이슬람 지역의 물자봉쇄를 위해 스타리모스트를 파괴하고 무슬림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했으며 이웃으로 살던 사람들이 서로 총을 겨누어 전쟁 후 도시 인구가 절반 정도로 줄었다는 엄청난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다. 도시 곳곳에 공동묘지가 소중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전쟁 때 파손된 많은 건물을 고치지 못하고 버려두고 있어 더욱 안타깝다. 다행히 스타리모스트는 97년 나토평화유지군이 유네스코의 지원 하에 부서진 잔해를 수거하고 터키의 건축가들이 재조립하여 2004년 다시 재건되었으며 200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 후 1993년의 참상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Don't forget 이란 표지석을 곳곳에 세우고 평화를 다짐하고 있다. 스타리모스트 옆 Crooked bridge 근처에 있는 모스크에서 점심 기도 드리는 의식을 함께 하며 전쟁당시 무슬림들의 고통을 되새겨 보았다. 이곳에서 기도를 집전하는 중년남성과 점심기도 드리는 할머니들은 생생하게 그 시절의 참상을 기억하실텐데 어떻게 용서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며 그 시절의 가해자들과 공존하고 계실까. 얼마나 깊은 신심으로 증오를 삭였을까. 게바라 : 남편이 지도를 살펴보고 몇몇 지점을 파악한 후 1시에 출발한다. 다행히 우산을 하나 주셔서 2개의 우산을 쓸 수 있다. 짐은 다 두고 간다. 차가 뿜는 냄새인지 걸을 때는 매캐하다. 올드 시티(스타리 그라드)에 갔다. 둥근 돌이 박힌 바닥과 터키의 사프란 볼루를 연상케 하는 오래된 이슬람식 가옥, 좁은 길, 수로를 따라 흐르는 수량이 풍부한 물들, 졸지에 다른 지역에 떨어진 느낌이다. 사람들도 별로 없고 문을 닫은 가게가 많다. 유명한 올드 브릿지(스타리 모스트)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다. 오스만 튀르크 때 만들어진 아름다운 이 다리는 93년 11월 9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쟁 동안 크로아티아 방위 평의회 부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다리를 복구시킨 것이다. 터키의 전문가들이 투입되어 18m 깊이의 물속에 빠진 돌들을 건져내어 다시 만들었다. 다리 위 바닥의 하얀 돌들이 오래되어 반질거렸다. 누구는 파괴시키고 누구는 그걸 어렵게 복구시킨다. 여름에는 여기서 번지 점프를 하기도 한다. 입구에 'Don't forget 1993'이라고 쓰인 돌이 있다. 같은 이웃으로 살던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다리 파괴 후 다수를 차지했던 이슬람계를 무차별 학살하고 추방했다. 재건된 다리는 화해의 상징이다. 이제는 서로 다시 사이좋게 지낸다고 한다. 계단을 올라가 조망하면 다리와 아래를 흐르는 짙푸른 물이 보인다. 오리들이 물놀이 하듯 동동 떠내려가기도 한다. 날마다 비가 와 수량이 엄청나다. 바닥 돌은 비에 미끄럽다. 다리를 건너 작은 상점들을 구경하다가 모스크에 들어가려고 했더니 남자가 1인 2유로 씩 내란다. 돈 받는 모스크에 들어 갈 필요는 없다. 이제는 전망대로 쓰이는 곳이다. 되돌아 건너와 '크룩트 브릿지'에 갔다. 스타리 모스트의 축소판 같은 귀여운 이 다리는 예전에 양쪽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다. 근처의 작은 모스크에 들어갔다. 할머니 두 분이 기도를 하고 계셔서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학살을 생각하며 평화의 기도를 드린다. 조용히 옆쪽에 계시는 할머니들은 모든 것을 경험하셨을 것이다. 그 고통과 상처를 딛고 그들을 용서하기까지 얼마나 힘드셨을까. 시간과 지역을 초월해 왜 인간에게 이런 일들이 생기는지 안타깝다. 광주에서 총 맞아 죽었던 사촌 오빠 생각도 나고 이 모든 상황들이 너무 슬펐다. 자꾸 눈물이 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모스크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집중했다. 잠시 후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들어 오셔서(이맘) 흰 모자를 쓰고 목을 가다듬으신다. 운 좋게 아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정말 우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읊으신다. 슬프고도 아름답다. 두 명의 남자가 더 들어와 뒤에 선다. 할머니들은 문의 오른편, 우리는 왼편에 앉아 있다. 기도 시간이다. 할머니들이 우리에게 일어서라는 눈짓을 보내신다. 이맘이 이끄는 대로 귀 뒤에 두 손을 댔다, 무릎에도 댔다가 엎드려 절도 한다. 20분 정도를 같이 하고 기도가 끝났다. 모두들 밖으로 나간다. 따뜻한 눈길로 눈인사를 하신다. 아마 우리가 이슬람 신자인줄 아셨을 거다.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길을 따라 다시 숙소로 돌아오며 건너편의 무덤을 살펴보았다. 겨우 20여년 지난 세월, 죽은 사람은 그 순간의 고통으로 끝이지만 가족들은 그 슬픔을 어떻게 견디어 내고 있을까. 전체를 둘러보는데 2시간 정도 밖에 안 걸렸다. 모스크에 오래 있었는데도 말이다. 크로아티아 체인 수퍼 콘줌에 갔다. 남편 몸이 안 좋아 닭죽을 끓일 것이다. 내륙에 들어 와서 그런 것인지 이곳 경제가 안 좋은 탓인지(아줌마 말로는 경기가 매우 안 좋단다) 과일도 야채도 볼품이 없다. 물가도 싼 편이다. 대충 사고 돌아와 닭죽과 야채 볶음을 만들었다. 남편은 인도네시아 라면을 생협스프를 넣어 끓였다. 우리 스프를 써서 제법 먹을 만하고 매우니까 감기에도 좋은 것 같다고 한다. 닭죽과 사온 고추피클과 곁들여 먹으면 제법 그럴싸하다. 물론 여기 닭은 기름기가 많아 엄청 걷어내야 했다. 기름이 없어 이 닭기름으로 야채를 볶았다. 닭기름이라니.. 집에서는 절대 쓰지 않을 재료들로 음식을 만든다. 맛있게 먹고 스위스 처녀까지 나중에 먹었다. 채식주의자이지만 한국음식은 처음이라면서 야채 볶음과 닭죽의 쌀 부분만 먹는다. 이 처녀에게 보스니아 입국 도장은 받았냐고 물으니 자기도 안 받았단다. 나갔다 다시 보스니아에 왔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서로 신기해했다. 모든 일정이 일찍 끝나고 일기를 쓰면서 쉰다. 남편은 아파하면서도 몸을 회복시키고 있는 중이다. 보스니아 TV는 우리나라에서 보듯 많은 외국 채널들이 들어와 있다. 항상 이렇게 먼저 장악을 하니 씁쓸하다. 남편은 보스니아 상황을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다. 책보다 자야겠다. 닭죽 이야기 아나키 : 며칠동안 골골거리는 남편을 보다 못해 마눌님이 닭죽을 만들기로 했다. 닭이야 수퍼에 있을 테고, 다른 곁재료는 없으니 마늘과 양파, 소금만으로 만들기로 한다. 통닭을 사려 보니 그릴에 구을 용도의 엄청 갑빠 큰 닭밖에 없다. 보통 1.5~1.7kg(11마르크 정도). 이만한 녀석을 사면 아마 며칠동안 닭닭거리며 살테지. 또 뭐가 있나 보니 닭 다리 2~4개를 모아 0.5kg가량 포장해 놓은 것이 있다. 저걸로 닭죽이 되려나? 냄비에 물을 붓고 닭 넣고 천일염으로 간하고 마늘 3통을 까 넣었다. 보글보글 잘도 끓지만 기름이 엄청 나온다. 닭껍질에 누렇게 기름이 가득 차 있는 녀석이므로. 기름은 계속 걷어 내어 옆 프라이팬 야채 볶는 데 투여. (사실, 이건 비추입니다. 식으면 야채볶음 바닥에 기름이 굳어요.) 계속 팔팔 끓이는데 국물 맛은 나쁘지 않지만 향기가 좀 거시기~ 하다. 역한 누린내가 난달까. 충분히 닭을 익히고 끄집어 내어 살을 발라 두었다. 닭국물에 기름을 한 번 더 걷고 쌀을 넣고 약간의 소금간을 한 뒤 마늘 한 통을 까서 편 썰어 넣었다. 일단 쌀을 중간정도로 익히고 닭 살 발라 놓은 것을 넣어 눌어 붙지 않게 계속 저었다. 어느새 누린내는 사라지고 닭죽의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 쌀 400g과 닭 500g 으로 6인분 정도 만들어졌다. 감기님이 물러나시기를 바라며 맛나게 먹었다. 다음날 아침. 목을 찌를 것 같던 감기는 목에서 머리로 이동했다.두통과 오한, 몸살님이 밤 새 몸을 휘감았다. 아침에 먹는 닭죽은 간이 좀 더 배어 좀 더 맛있지만, 아무래도 우리나라 닭 보다는 약성이 덜한 듯. 맛은 참 좋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개요를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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