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 추장 시애틀의 연설문 - 1페이지>


미국 서부 지역에 거주하던 두아미쉬-수쿠아미쉬 족(族)의 추장 시애틀의  연설문이다. 이 연설이 행해진 것은 1856년, 미합중국 대통령  피어스에 의해 파견된 백인 대표자들이 이 인디언 부족이  전통적으로 살아온 땅을 팔 것을 제안한 데서 비롯되었다.  지금의 워싱턴 주에 해당하는 이 지역 토착민들의 삶터를  차지하는 대신에 그들이 평화롭게살 수 있는  보존 지구를 주겠다는 것이 백인 정부의 제안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몸집이 장대하고 우렁찬 목소리를 가졌다고 전해지는  시애틀 추장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는데, 이 거의 시적이라고  할 만한 연설문은 오늘날 환경과 자연에 대한 분별없는  파괴의 결과로 인하여 전 인류가 심각한 고통에 직면하게  된 시대에 오히려 생생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19세기라는 한정된 시대를 뛰어넘어서 지금의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전해 오는 이 연설문의 아름다움과 진리성은, 본질적으로  우주와 세상을 조화로운 질서 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보는  통합적 비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력은 실은 인류사의 오랜 전통에서 많은 현자들과  신비가들에게, 그리고 많은 구미 전통에서 잘 알려진 세계관에  뿌리를 둔 것이다. 자연에 근거한 소박한 언어와 이미지와  비유를 가지고 시애틀 추장은 존재의 위대한 신비와 인간의  삶터와 창조주와의 관계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을 표현한다.

우리가 이 연설문에 나타난 생각을 단지 원시 자연 숭배나 애니미즘의 선언으로  간주한다면, 이 발언 속에 포함된 깊은 진리를 지나쳐 버리게  될 것이다. 시애틀 추장은 자주 어머니로서의 땅(大地)혹은 자아로서의 땅에 주목하여 인간이란 자연  속의 먼지나 아이와 같은 존재임을 환기하고, 그러면서도  인간에게는 땅을 지키고 보  호할 거룩한 임무가  창조주로부터 주어져 있음을 주목하기도 한다. 생명에 대한  봉사의 정신과 깊은 겸손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인간적  위엄을 가지고 그는 그 자신과 자기 부족의 전통에서 깨우친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백인의 난폭한 욕망이 필연적으로 토착적 전통 가치를 파괴하고, 인디언  문화의 멸망을 초래할 것임을 내다보면서도 창조주의 자비로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견지한다. 그리하여 그는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 가는 인간의 근본적인 운명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 모두를  이 세상 만물의 무수한 다양한 형태 속에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는 하나의 거룩한 존재를 발견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인디언 문화의 근본적인 비폭력성과 그들이 느끼는  우애와 형제애의 중심에는 실로 이러한 거룩한 존재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 인식은 모든 것이 상호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는 우주의 근원적 구조를  알게 하고, 모든 존재, 모든 사람이 참으로 공통한 운명에  종속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커다란 통합적 비젼이야말로  진정하게 비폭력적인 삶의 기술을 보장하는 원천이 아닐  것인가? 우리가 이러한 비젼에 동참할 것인가 어쩔 것인가는  자유롭게 선택해야 할 문제지만, 이것을 완전히 무시할  때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파국에 직면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존재의 공통한 운명과 상호 의존성에 대해 언급하는 인디언 추장의 발언에 귀기울인다는 것은 우리가  좀더 겸손하고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