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베리아-바이칼여행 - 7월29일(금)

2. 7월 29일 생소한 하바롭스크

아침 7시 반에 일어났다. 이 여행에 대한 준비와 열차표 끊을 고민으로 분주했던 남편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단다. 공부, 언어, 여행 준비 모두 열심이라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다. 나는 초반에 바짝 준비하다 여행 직전 느슨해져서 '사람 사는 곳인데 될 대로 되겠지' 하는 스타일이고 남편은 느긋하다가 떠나기 며칠 전에 바쁜 타입이다.

아침에는 바깥 공기가 제법 차다. 그러나 방은 따듯하다. 아침으로 라면과 빵을 먹었다. 아침에 가이드 청년이 12시에 보람이와 지율이가 와서 우리의 표를 끊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고 한다. 참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밖으로 나가서 이 도시에 대한 감도 잡을 겸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날이 쌀쌀해서 긴 팔을 입고 나가야 한다. 완전한 가을 날씨다. 길거리 가게들과 사람들도 구경하고 여자들과 아이들도 본다. 여자들은 키도 크고 늘씬하다. 웬만한 우리나라의 몸매 좋다는 사람들도 기가 죽을 만큼 멋있는 여자들이 많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무척 뚱뚱해진다.

0729.김유천거리.jpg
김유천거리 표지판

김유천 거리(자랑스러운 우리나라 사람, 젊은 혁명가로 적군에 가담하여 싸우다 29세에 죽었다)를 지나 중앙시장에 도착했다. 개구리 알 같은 모양의 베리, 산딸기, 검은 딸기, 블루베리 등 다양한 이국적인 과일들을 판다. 한번 먹어보자는 말은 할 줄을 몰라서 못하고 망설이는데 우리 숙소에 같이 머무는 한국 팀을 만났다. 가이드 청년의 도움으로 고려인 가게에서 산딸기를 샀다. 다른 분들이 산 것도 함께 먹어 보았는데 당분은 적으나 향기가 좋다. 체리와 비슷한 과일은 별로다. 케밥 종류를 파는 곳도 있다. 동양인은 주로 고려인 인 듯하다. 건물 내의 시장에서 햄과 치즈, 고려인 가게에서 알 밥과 김밥을 샀다.

0729.중앙시장육류점.jpg
중앙시장육류점

숙소에서 12시까지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진이 빠질 만큼을 30분 간 걸어야 했다. 지친 해안이는 방에서 쉬기로 하고 보람, 지율이와 기차표를  파는 곳에 도착, 일종의 판매소인데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우리를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주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보람이는 자기도 처음이니 경험이 된다면서 친절하게 대해주었지만 우리에게는 정말 큰일이었다. 그 날짜의 표를 끊을 수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비쌌다. 3사람이 50만원 정도 나왔으니까!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좋은 4인실이라지만 어쨌든 그 가격이 놀라왔다. 방콕과 미얀마를 오가는 왕복 비행기 값 수준이다. 수수료를 좀 주고 싶었는데 경험이라며 거절을 하니 더 미안했다. 그리고는 점심 뷔페를 먹으로 중국식당에 가는데 같이 가겠느냐고 한다. 보람이와 다니면 우리는 좋지만 당사자는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다니기가 번거로울 텐데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제안한다. 숙소에 가서 해안이를 데리고 처음으로 러시아 시내버스에 올라 아무르 강가의 '샹강'이라는 음식점에 갔다(버스 10R). 유학생인 다운이와 중국여학생도 함께 만나서 갔다. 썩 맛있지는 않지만 일단 가격이 싸고 여러 가지 음식이 있어서 나는 잘 먹었는데 남편과 해안이는 별로 먹지 못했다(1인 120R). 맛있다고 하는 탕수육도 입맛에 맞는 편은 아니었다.

0729.성모승천사원에서.jpg함께 아무르 강가의 아름다운 러시아 정교 성당에 갔다. 카톨릭과는 달리 성상 대신 이콘이라는 벽화들이 있고 의자가 없으므로 모든 의식은 서서한다. 장소는 좁은 편이며 입구 맞은편 벽 전체가 이콘 그림으로 채워져 예수의 삶을 그리고 있으며 아래의 작은 문에서 사제가 나와 의식을 집전 한단다. 러시아 정교는 생활 종교로 수시로 사람들이 와서 기도를 하는 장소로 절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자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머플러를 하나씩 쓰고 들어오며 분위기는 경건하다. 정교가 들어올 때 여러 가지를 고려하다가 술을 금하는 이슬람교는 러시아의 보드카를 즐기는 문화와 맞지 않기 때문에 배제되었다고 한다. 분위기가 자연스러우면서 형식이 적어 괜찮았다.

보람이, 지율이와 걸어서 돌아다니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레닌 광장부터는 몸이 젖을 만큼 내려서 놀이공원의 노천 맥주집 '아사히'에 들어갔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뭔가 대접을 하고 싶었다. 러시아 맥주들은 싸며 생각보다 깔끔하고 맛이 좋다. 맥주를 싫어하고 소주를 좋아하던 남편도 올 때까지 하루에 한두 번은 맥주를 먹는 습관이 생겼다. 이곳 사람들도 보드카를 먹는 모습은 거의 없고 주로 맥주를 많이 마신다.

0729.보람.jpg
보람

서로 낯선 사람들이지만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끊임없는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들의 살아왔던 얘기들, 좌절된 꿈 얘기를 들었다. 죽이 잘 맞는 청년들이고 생각이 밝고 반듯하며 삶에 대해 적극적이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려서 춥다. 다시 비를 맞으며 걸어서 숙소 건너편의 백화점까지 왔다. 이곳 사람들도 비가 내리건 해가 뜨겁건 개의치 않고 묵묵하게 다닌다. 많이도 걸었다. 해안이는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주변 PC 방에서 이르쿠츠크 호스텔에 도착시간을 알려주고 나와 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우리나라에서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어 이미 연락해 두었던 곳이다. 영어가 되는 숙소라서 이르쿠츠크부터는 걱정이 없다. 백화점의 카페에 들어가려다가 오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는 아니어서 다시 버스를 타고 아무르 강가로 갔다. 싸고 괜찮다는 카페에서 닭고기, 연어, 감자튀김, 생맥주를 먹었는데 이번에는 화제가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어쩌다 보니 상담해주는 사람같이 되어버렸다. 같이 나누던 얘기가 어느새 남편과 지율, 나와 보람이가 일대일 상담처럼 나누어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직도 할 얘기가 많이 남아 이번에는 인뚜리스트 호텔의 바로 갔다. 이번에는 보람이가 낸다고 한다. 어려운 유학생의 대접을 받으려니 좀 마음이 아팠지만 나중에 우리나라에 오면 만나서 맛있는 걸 사 주기로 했다. 음악, 영화, 정치로 화제가 바뀌었다. 많은 나이 차이가 나지만 우리는 생각이 신기하게 비슷하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과연 이 어린 아이들이 우리나라를 잘 이끌어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는데 자기 삶을 열심히 개척하려는 이들이 무척 든든하고 대견하다. 그런데 이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처럼 특이한 생각을 가진 소수자이다... 우리의 생각이 보편적이 되는 때는 언제일까? 우연히 만나 하루 종일 마음이 통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인연의 끈이 놀라울 뿐이다. 게다가 둘의 집은 우리 구역인 안양이다. 보람이 덕분에 하바로프스크가 하루 만에 우리 동네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미 시간이 9시가 되었고 해안이가 기다리므로 아쉽지만 헤어져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를 버스에 태워 놓고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는 저 두 청년이 잘 되기를 바란다. 잠자는 해안이를 깨워 백화점 수퍼에서 햄, 빵, 치즈, 라면, 요구르트, 쥬스 등 3일간의 먹을거리를 사고 돌아왔다.

오늘은 비싼 기차표 때문에 배낭여행 역사상 가장 화끈하게 돈을 쓴 날이 되었다. 이 여행에서는 처음부터 운이 좋게 모든 것이 잘 풀려 나가고 있어 기분이 좋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친절이 몸에 밴 멋진 청년들, 보람이와 지율이를 만나서  참 즐거웠던 하루다.

 

이전장 상위메뉴로 다음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