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시베리아-바이칼여행 - 7월30일(토) |
지금은 5시, 한국시간 3시이다. 남편이 일어나 잠에 취해 헤매며 화장실 문을 찾는 걸 도와주다가 잠이 깨버렸다. 잔인한 사람들과 싸우다가 극복해내는 그런 종류의 꿈을 꾸었다. 러시아에 와서 느낀 어려움 때문인가... 그러나 겨우 이틀이 지났지만 모든 것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한때 초대소였던 이 숙소조차도 그렇다. 예전에 자르비노 세관에서 러시아인들을 처음 보았을 때 무뚝뚝한 모습 뒤에 숨겨진 솔직함과 따듯함을 느꼈다. 세관에서 파는 과자, 아이스크림, 요구르트, 초콜릿 등의 맛은 속임 없이 진짜라는 느낌이 들어 그들의 첫인상은 여러모로 좋았다. 몽골에 갔을 때, 러시아인은 몽골사람처럼 의리가 있고 좋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 두 번째 선입견이 되어 드디어 러시아에 왔다. 아직까지는 영어가 안 되면 무시를 당한다는 보람이의 말이 실감나지 않는다. 이들은 유럽인들 보다 선이 부드럽고 고우며 코가 마늘처럼 작고 오똑하다. 길에서 만나는 여자, 아기들, 우리말로 '안녕하세요!' 하는 청년들도 왠지 익숙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웃고 마음을 열고 대한다면 누구나 박하게 대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만약 무뚝뚝하게 나온다 해도 어디에나 별난 사람은 있는 법이니 상심할 일은 아니다. 러시아 말을 안다면 톨스토이의 나라 사람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배울 텐데 그 점이 아쉽다. 이미 잠은 달아나 버렸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베란다에 나가 바닥에 타올을 깔고 요가와 운동을 했다. 14도 정도의 무척 선선하고 좋은 날씨이다. 해가 밝아오는 하늘을 보다가 모기 때문에 들어와서 다시 잠깐 잤다. 아침은 모두 빵과 라면을 먹고 짐 싸서 출발. 열심히 걸어서 하바 역에 도착했다. 공사 중이라 옆쪽으로 들어갔는데 나가는 문도 알 수 없고 다들 영어를 모르니 도움을 청할 수가 없다. 우리는 열차 타는 법을 모른다. 결국 망설이다가 밖으로 나와 경찰 비슷한 복장의 두 명에게 물으니 열차 표를 보고는 자기 시계를 돌려가며 타는 시간을 알려준다. 열차 표에는 모스크바 시간으로 표기되므로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야한다. 이것은 이미 남편이 알아낸 것이라 우리도 알고 있었다. 타는 곳은 손짓과 몸짓으로 다 표현한다. 뭔 소리인지 금방 이해가 되었다. 그 분 말대로 반대편 옆쪽으로 들어가니 전광판에 열차 번호와 플랫폼 번호가 뜬다. 우리 열차는 좀 있다가 떴다. 플랫폼 번호가 뜨면 그곳으로 가서 타는 것이다. 해당 칸의 차장이 표를 확인해 주면 들어갈 수 있다. 열차는 텅 비어 있었고 커튼과 복도의 카펫을 보니 2인실 다음의 최고급 열차였다. 요즘 같은 성수기에도 비싸니까 비어있는 거다. 기대보다 쿠페의 방은 작은 편이고 좀 답답했다. 자리는 편하고 깨끗한 것이 중국의 '연와'와 비슷하다. 복도 쪽에만 창문이 열리므로 아예 복도 창에 매달려 바깥을 구경하는 것으로 거의 하루를 보냈다. 자작나무 숲, 침엽수림, 끝없이 펼쳐진 야생의 초원에는 꽃들이 환상적으로 피어있는 모습이 태초의 자연 그대로이다. 예전에 자르비노에서 보았던 벌판 그대로이다. 당귀, 지칭개, 마타리, 동자꽃, 도라지(이 꽃을 여기서 보았을 때 역시 우리의 땅이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바늘꽃 등이 군락을 이루어 핀다. 그래서 멀리 펼쳐진 벌판의 꽃들은 무더기지어서 피므로 분홍, 노랑 하양, 푸른색 덩어리로 보인다.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 않다. 우리가 준비한 음식들 이외에 가끔 정차하는 역에서 다양한 먹을 것을 살 수 있었다. 토마토, 오이도 있기 때문에 정차하는 역을 잘 이용하면 큰 준비는 안 해도 될 듯하다(그러나 동쪽으로 갈수록 파는 품목이 줄어듦으로 이것만 기대하다가는 굶는다). 소시지인 줄 알고 수퍼에서 사온 것은 발라먹는 스프레드였는데 물러서인지 쉽게 상했다. 타원형 쏘시지 모양의 비닐을 입으로 뜯었다가 용암처럼 넘치는 묽은 죽 같은 것을 내 입으로 들어와서 머금었다가 뱉는 사태가 발생했다(그 다음날도 한번 더했음). 비위 좋은 나보다 두 사람이 더 힘들게 지켜본다. 뜨거운 물을 부어먹는 러시아 라면은 스프 끓인 맛처럼 담담하다. 넷이 하루 종일 4개의 작은 라면을 먹었다(1개, 4-6R). 스프레드 치즈 '비올라'는 맛이 좋고 일명 '톰과 제리' 치즈인 '에멘탈'의 맛도 대단히 훌륭하다. 빵은 '흑빵'과 짜파티 같은 밀전병 구운 빵이다. 우유, 요구르트, 역 정차할 때 사먹는 아이스크림(마로제나예), 크바스(흑빵으로 빚은 발효음료) 종류는 무엇이건 다 맛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예쁜 언니 둘이 나타나서 몇 명이냐고 묻고는 안 먹는다고 고개를 젓는데도(돈 받는 줄 알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세 명의 식사와 후식을 주는 거다. 나중에 돈을 받으러 오는 것인지 고민을 하면서 먹었는데 결국 표에 포함된 것이었다. 3일간 세 번의 점심을 주었는데 따듯한 음식을 공짜로 먹으니 만족스러웠다. 거의 기내식 개념으로 차, 과자, 초콜릿도 후식으로 준다. 주로 바깥 구경을 하는 나, 풍경과 책을 교대로 보는 남편, '걸리버 여행기'에 빠져 있거나 회화 책을 보다 자는 딸, 열차에서 시간 보내는 방법은 다 다르다. 시간이 흐를수록 약간의 사람들이 더 탔을 뿐 역시 거의 빈 열차이다. 반면에 만나는 열차의 6인실은 모두 꽉 차 있고 우리 열차도 마찬가지이다. 해안이는 7일이라도 탈 수 있을 만큼 편하고 좋단다. 모두 만족스러웠다. 3일 간의 여유에 러시아 적응 스트레스가 다 풀렸다. '이르'에 가면 사람도 나와 있을 거고 걱정이 없다. 남편은 앞으로 야쿠트 공화국과 캄챠카 반도에 가보고 싶다고 한다. '하바'에서 비행기로 가야한다. 물론 거주지 등록이나 비싼 숙소 문제가 해결되고 여행 시스템이 잘 구축된 후에 말이다. 할 일이 별로 없으니 음식을 조금씩 하루에 네 번 이상은 먹고 있다. 물론 집에서 가져 온 넛트류와 간식도 먹는다. 저녁 식사를 하고 11시가 되니 완전히 어두워진다. 씻고 자야하는데 낮잠을 자니까 쉽게 잠이 안 온다. 구름이 끼어서 별은 잘 안 보인다. 더워서 복도 쪽 문은 열어 놓고 자다가 나중에 닫았다. 닫으면 무척 답답한 느낌이 든다. 낮에 본 풍경 중에 우리에게 익숙한 붉은 소나무 숲 속에 나무 집을 짓고 사는 사람, 걷는 사람들을 보면 황인종이 보여야 할 것 같은 곳에 낯선 백인들이 있어 이상했다. 동양 풍경에 서양인은 역시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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